[어쩌다 UX 라이터] 사용자가 몰입할 수 있는 문장을 번역하는 일

센트비 프로덕트 라이터 박희영

UX Writers in Korea | UXWK
10 min readFeb 12, 2023

힘들 때 가장 도움이 됐던 말은 ‘완벽한 텍스트는 없다’예요. 오늘 완벽해 보이는 텍스트도 내일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고, 텍스트는 상황에 따라 변하고 또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 됐어요.

박희영

통번역대학원을 졸업 후, 공공기관에서 통번역가로 일했다. 현재는 20개 언어로 서비스되는 해외 송금 서비스 센트비에서 프로덕트 라이터로 일하고 있다.

커리어 한눈에 보기

산림청 • 통번역가 (2018년 3월~2019년 12월)

통번역 대학원을 나오고, 첫 직장인 산림청에서 통번역가로 일하며 학부 전공과 대학원 전공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어요.”

에이전시• 번역가 및 UX 라이터 (2020년 5월~2021년 7월)

번역을 할 때보다 UX 라이팅을 하면서 더 큰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런 자유로운 매력이 이후에 번역가가 아닌 UX 라이터의 길을 선택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센트비 • 프로덕트 라이터 (2021년 11월~현재)

제 업무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라이팅 초안부터 계속 피드백을 받고, 왜 이렇게 썼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리를 따로 마련했어요.”

센트비의 Product Writer (UX Writer) 박희영님이 인터뷰에서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Sungbae Kim

2022년 10월 16일에 진행된 인터뷰로, 읽는 시점에 따라 현재와 다른 사실이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다 UX 라이터

모바일 게임이 이끈 UX 라이터의 길

제 학부 전공이 Parks, Recreation and Leisure Studies예요. 쉽게 말하면 공원과 공원 관리를 다루는 학문이죠. 졸업 후에는 통번역 대학원을 나왔고요. 첫 직장인 산림청에서 통번역가로 일하며 학부 전공과 대학원 전공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일 년 정도 지나니 이전에 썼던 글을 똑같이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공공기관이다보니 자주 쓰는 문구(phrase)를 기반으로 보수적으로 글을 다뤄야했어요.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글쓰기에 대한 목마름이 생겨났던 것 같아요.

한때 모바일 게임에 빠졌었거든요. 캔디크러쉬사가는 로딩 화면에 “캔디를 만드는 중”이라거나 “난쟁이들이 푸시업을 하는 중”처럼 재밌는 문구가 쓰여있었어요. 이렇게 작은 문구도 게이머가 게임에 몰입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번역가로서 이런 문구을 어떻게 쓰고 번역하는지 자연스럽게 궁금해졌어요.

모바일 게임 캔디크러쉬사가의 로딩 중 화면. “Making candy”라는 게임에 몰입할 수 있는 문구를 사용했다.
모바일 게임 캔디크러쉬사가의 로딩 중 화면. “Making candy”가 “캔디를 만드는 중"으로 번역됐다.

당시엔 UX 라이팅이라는 분야를 몰랐기 때문에 단순히 로컬라이제이션이라고 생각했어요. 게임 회사에서 번역가로 일하면 이런 글쓰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여러 게임 회사에 지원했어요.

2020년 5월, 한 에이전시에서 UX 라이팅 업무를 제안받았어요. 그걸 계기로 마침내 내가 생각했던 게임 속 문구가 로컬라이제이션이 아닌 UX 라이팅의 영역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제안은 당연히 승낙했어요.

UX 라이터 도전기

어려움 1. 글쓰기에 대한 고정관념

처음에는 글쓰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게 어려웠어요. 통역이나 번역은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하는 중개자의 입장이고, 외교 문제나 큰 손실로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실수가 용납되지 않아요. 그래서 토씨 하나도 바뀌게 쓰면 안 된다고 배우죠.

또 내가 드러나면 좋은 번역이 아니라고 해요. 번역가는 단순한 중개인이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보니 글에 자의적인 해석을 담기 어렵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만이 중요해요.

하지만 UX 라이팅에서는 같은 상황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말할 수 있어요. 오류 메시지를 예로 들면, 텍스트를 잘못 입력했을 때 “텍스트를 잘못 입력했습니다”라고 말할수도 있지만 어떤 텍스트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수도 있고, 다시 입력하라고 해결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번역가로 일하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어려움 2. 전략과 규칙 세우기

UX 라이팅은 항상 전략과 규칙이 있어야 해요. 초반에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왜 이렇게 썼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얼버무릴 때도 있었어요. 내가 만든 글에 대한 반박이 마치 나에 대한 공격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UX 라이팅이 재밌지 않았다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했을 거예요. 저는 다양하게 써보고 시도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요.

번역을 할 때보다 UX 라이팅을 하면서 더 큰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런 자유로운 매력이 이후에 번역가가 아닌 UX 라이터의 길을 선택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어요.

센트비의 Product Writer (UX Writer) 박희영님이 책을 보고 있다.
©Sungbae Kim

어려움 극복한 방법: 낯설게 보기 훈련

글쓰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깰 수 있었던 건 낯설게 보는 훈련 덕분이에요. 이미 쓰여진 글을 낯설게 보고 왜 이렇게 썼을지 의문을 갖고 한 번 더 생각했어요. 만약 낯설게 보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글쓰기에 대한 기존의 틀을 바꾸고 다양한 관점을 갖기 어려웠을 거예요.

번역에서도 자연스럽게 번역하기 위해 낯설게 보는 훈련을 해요.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은 직역하면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질문이다”예요. 하지만 앞뒤, 전후 상황, 화자의 마음 등등을 고려하고 계속해서 낯설게 보았을 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같은 더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번역할 수 있어요. 만약 그 문장에만 매몰되어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면, 이렇게 적절한 은유로 번역할 수 없었을 거예요.

만약 이 문장을 UX 라이팅 관점으로 풀어써야 한다면 이런 고민을 할 것 같아요.

  • 팝업으로 띄워야 하나? “죽지 않으려면 뒤로 돌아가세요”와 같은 메시지에 버튼은 [죽기], [살기]로 쓰면 되나?
  • [죽기], [살기] 버튼 중 어떤 게 더 먼저 나오게 할까?
  • 버튼 길이를 더 길게 해서 [저는 지금 죽고 싶은데요], [아직 살 여력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쓰면 어떨까?
  • 의문형(“지금 죽고 싶습니까?”), 긍정문(“나 지금 죽어야겠다”), 부정문(“죽고 싶지 않다면, 뒤로 돌아가세요”) 중 어떤 것으로 쓸까?
  • 처음부터 팝업을 보여주지 않고 ON/OFF 토글을 주고 토글을 ON하면 “정말 죽으시겠습니까 ?”라고 팝업을 띄우면 어떨까?
  • 팝업을 띄울 것인지 띄우지 않을 것인지 UX 디자이너와 이야기해서 결정해야겠다.
  • 개발자에게 이 메시지를 띄우는 데에 개발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물어봐야겠다.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UX 라이팅으로 표현한 예시
같은 메시지도 다양한 방식으로 쓸 수 있다. 좌측과 우측, 어떤 게 더 좋은 UX 라이팅일까?

이렇게 UX 라이터는 문장뿐만 아니라 메시지를 노출하는 상황까지 낯설게 봐야 해요.

힘들 때 가장 도움이 됐던 말은 ‘완벽한 텍스트는 없다’예요. 오늘 완벽해 보이는 텍스트도 내일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고, 상황에 따라 텍스트가 달라지고 개선될 수 있다는 걸 아는 게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됐어요.

센트비의 Product Writer (UX Writer) 박희영님이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Sungbae Kim

UX 라이터로 일하기

에이전시와 인하우스 UX 라이터 업무 차이

에이전시에서 일할 땐, 한 직종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직종의 회사들과 일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어요.

한편 회사의 내부 사정을 알기가 어려운 게 힘들었어요. UX 라이팅 특성상 한 문장을 쓰는 데에도 많이 질문이 필요해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거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온라인이나 슬랙으로 했어야 했고, 정확한 정보를 원하는 시점에 받기가 어려웠죠.

또 에이전시에서는 비언어적인 정보를 얻는 데에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어요. 저는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뿐 아니라 비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센트비는 젊고 커뮤니케이션을 많이 하는 회사예요. 그래서 어떤 활발함이 느껴지는 분위기이고 이런 활발함을 서비스에도 담고 싶어해요. 그런 게 앱만 봐도 보이지만 회사 구성원을 봤을 때도 느껴지거든요. 하지만 그런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텍스트를 작성하다보면 회사에서 원하는 것과 방향성이 달라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해요.

센트비의 첫 UX 라이터로서 한 일

센트비로 이직 후 초반에는 UX 라이터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게 필요했어요. 왜 텍스트를 작성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지, 텍스트를 쓰기 위해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제 업무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라이팅 초안부터 계속 피드백을 받고, 왜 이렇게 썼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리를 따로 마련했어요. 어떻게 라이팅했는지 소개한 뒤에는 디자인, 기획, 개발, QA에서 오는 피드백을 수용해서 방향성을 조정하고요. 그 외에도 라이터가 하는 업무에 대해서 소개하는 자리를 직간접적으로 계속해서 만들었어요.

나중에는 고객이 더 분명하게 상황을 알 수 있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았어요. 예를 들어 “송금이 취소됐어요”라는 기존의 텍스트에서, 왜 송금이 취소되었는지를 서버 개발자분에게 문의한 뒤 케이스를 세분화해 사용자에게 딱 맞는 문구로 변경했어요.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을 제안해준 덕분에 동료들도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됐다는 피드백을 받으면 보람을 느껴요.

센트비의 Product Writer (UX Writer) 박희영님이 책장의 책들을 둘러보고 있다.
©Sungbae Kim

UX 라이터에 대한 나의 정의

다른 듯 비슷한 번역과 UX 라이팅

번역에서 말하는 좋은 텍스트는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글’이에요. 만약 읽는 과정에서 단어나 문장이 걸리적거리면 좋지 못한 번역이에요. 독자에게서 “번역이 이상하다”거나 “문장이 이상하다” 같은 코멘트가 나오면 안되고 “재밌다”, “내용이 식상하다”같은 코멘트만 나와야 해요.

한편 UX 라이팅에서 말하는 좋은 텍스트는 ‘사용자가 시작한 작업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돕는 글’이에요. 사용자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중간에 이탈하지 않도록 갈 수 있게 울타리 역할을 해줘야 해요. 만약 사용자가 화면의 문구를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다면 결국 CS 문의를 하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서비스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디자인, 개발에서 채울 수 없는 영역을 채우는 일

UX 라이터라는 직무를 아직 생소해하는 기업들이 많아요. 또 UX 라이터가 없어도 서비스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라이터가 정말 필요한지 의문을 갖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의 사용자는 이전보다 고차원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단순히 앱이 잘 작동된다고 해서 좋은 서비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보니 디테일한 부분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UX 라이터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요.

디자인과 개발은 서비스의 가장 기본이예요. 라이팅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디자인, 개발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야 하죠. 하지만 사용자가 보고 있는 화면을 정의하는 건 디자인과 기술이 아닌 텍스트만 할 수 있어요.

글 이연성 | 사진 김성배 | 일러스트 유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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